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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제일고등학교총동창회

동문 에세이

J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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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MP"


2010년 5월 18일 서울 하늘을 잿빛 하늘이다.
1973년 4월 서울 종로구 YMCA 건너편 금강산업주식회사에 취직되어 경리과에 근무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서울 중심가 은행에 예금하고 송금하면서 회계를 보는 일이었다.

수개월 근무하면서 서울 중심가를 바둑판 보듯이 꿰뚫어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강릉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업되어 돈을 만지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십 수 억을 만지기도 하였다. 내 봉급 35,000원은 돈같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운동하면서 주산 2급 부기 2급을 취득하여 건설회사에서 많은 돈을 만지면서 거의 실수가 없었던 그 시절 나는 서울 종로 1가에서 1년 남짓 경리를 호화스럽게 하였다.

그 때 하늘을 찌를 듯 바라보던 삼일 빌딩이 내 마음이 하늘처럼 자랐는지 31층이 낮게 보였다. 그리고 37년 만에 서울 종로 1가 탑골공원에 선생이 되어 서울에서 동쪽 끝 동해바닷가 강릉에 중학생 300명을 데리고 공연을 보러 나타났으니 참으로 세월은 많이 흘렀다. 직업을 바꿔 선생님 되어 과거에 근무하였던 그 자리에 갔으니 또한 감개무량하기도 하다.
학교 아이들은 제일 좋아하는 점프 공연을 관람하였다.

나는 수학여행 프로그램에 점프공연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번지점프라고 생각하고 고층빌딩에서 수직 아래로 떨어지는 스릴을 맛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들이 참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점프 장으로 들어갔다.

이게 웬일인가
점프 장으로 가는 길이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다 보니 어느덧 4층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문을 열면 점프장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아뿔싸,
점프장이 아니라 점프공연장이었다.
모두들 오는 순서대로 공연 장안에 의자에 앉았다.
모두 자리를 정돈하고 앉아있는데 옆에 있는 선생님의 휴대폰이 드르륵 소리가 났다.

선생님은 휴대폰을 보더니 참 어이가 없는지“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묻자 내용은 이러하다.
자기 반 여학생 한명이 학생이 앉아있는 자리가 가운데가 아니라서 담임선생님에게 따진 문자였다.

“선생님 같은 돈을 내고 왜 내가 옆에 앉아야 하나요.”라고 보내왔다.
선생님은 그 학생의 자리에 가서 보니 원형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잘 보였다.
선생님은 아이를 설득하고 돌아 아이들에게 대하여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나는 그 선생님에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시죠

“그래 버스를 타는데 뒷좌석에 앉으면 반값으로 깎아주나.?”
라고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리고 씁쓸한 마음으로 공연을 모두 끝냈다.
“내용은 평범하게 살자“라는 주제로 무술을 코믹하게 연기하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공연이었다.
요즘 세상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이기주의, 자기만 편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욕망이 가득찬 어른이나 아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탓하랴
우리들이 자랐던 지난 세월은 밥상에 맛있는 먹을거리는 늘 남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상에 올라오는 양을 확인하고 자기 몫만 챙겨서 먹었다.
한 이불을 형제들이 서로 당기고 밀면서 잠을 잤고 그 추운 엄동설한에 아랫목은 서로 나누어 자면서 형제의 우애를 키우면서 자랐다.

삼복지절 많은 식구들이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위에서 꽁보리밥과 오이냉국에 별을 세면서 더위를 식히는 그 행복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멀리 손님이 오시면 평소 먹어보지 못한 이밥을 다락방 쌀독에서 꺼내어 보리밥 한가운데 소복이 넣어 밥을 지었다.

그리고 손님에게는 그 밥을 따로 퍼서 사기 밥그릇에 담아 대접을 하였다.
형제들은 혹 손님이 밥을 남기면 누가 그 밥을 먹을 것인가 하고 고민하면서 기다렸던 순박한 시절, 그대로 그때는 인정이 샘솟고 사랑이 충만하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 살아왔지만 우리의 지난 과거는 사람같이, 사람다운, 사람답게 살아오든 시절이 있었다.

“선생님 왜 같은 돈을 내고 나는 가운데 못 앉나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본다.
그럴수록 기성세대들은 더더욱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하여 올바르게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육성하는데 모두 나서야 한다.

내가 부모님을 모시지 않으면 언제인가 나도 길가에 버림을 받을 것이며, 내가 윗사람을 섬기지 않으면 언제인가 아랫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세월은 전광석화처럼, 쏜살처럼 흘러간다. 창해의 인생의 인생백년은 바닷가 한 알의 모래알이 아니던가. 율곡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37년 전 종로 1가처럼 사람도 변해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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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박형준님의 댓글

  선배님 글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됩니다.

대학 졸업후 서울 한복판에서 넥타이 메고 일하는것에 대한 동경으로
여행사에서 3년간 일하면서 대리도 달고 나름대로 이곳저곳에서 인정도 받았지만
끊임없이 영리만을 추구해야 하다보니, 상도가 아닌 상술을 부려야 하는 둥

저와는 그다지 맞지많은 않은것 같아서 회사다니는 틈틈히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작년에는 모교로 교생도 다녀왔구요. 여름에 석사 수료하고

현재 임용시험에 준비하고 있는지라 솔직히 많이 힘들었는데...
저보다 먼저 걸어가신 선배님이 있다는 것에 큰 힘이 됩니다.

서울이란 도시가 참 화려한 반면 외롭기도 한 곳이라
가끔은 고향 땅 강릉이 너무 그립지만,

그래도 많은 곳을 보고 듣고 배우려면 이곳에 체재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나마 작년부터 살고 있는 이곳 노원은 뒤에는 대관령과 같은 산도 있고
남대천만한 중랑천도 있고 그냥저냥 서울 도심보다는 강릉과 비슷한 느낌이라 좋네요 ^^;

차후에 교사 임용에 성공하면 꼭 언젠가는 연어처럼
모교로 돌아가 제가 배운 소중한 것들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심재칠님의 댓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힘을 기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하였습니다.
설산의 고행으로 머리에 풀이 돋아나 견성대오 하듯이 천신만고의
여정 끝에 꽃은 피어나리니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나니
유혹의 바다를 건너고, 고통의 날들을 감수하면서
지식과 지혜를 쌓고 또 쌓아
큰 관문을 통과하여 밝은 햇살로
그대의 꿈을 이루기 바라나니
어디 쉬운 것이 있으랴
씨가 말라가는 강릉제일고인 출신의 동문 선생님 중에
형산의 옥처럼 빛나는 훈장을 달고
용봉대에서 청운에 꿈을 꾸는 후배들을 위해
교단에 선다면 또 한 명의 횃불이 모교의 미래를
밝혀 주리니
열심히 노력하시라
그리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시라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