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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제일고등학교총동창회

동문 에세이

얼굴 橫說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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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실명제 橫說竪說”


링컨은 “마흔 살 이후의 얼굴은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40를 불혹 不惑 이라 하여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았다는고 하였으니 결국은 자기의 얼굴을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된다고 설파하였다.
책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사람다운 행위를 말하는 것일게다.

이때에 ‘얼굴’이란 무엇인가
눈이나 코나 입의 생김새나 위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 잘생기고 못생긴 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녹아 흐르는 섬세한 역동성이 있는 얼굴이며 그 사람의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구를 그릴 때 표정은 그냥 친구의 얼굴이 동적으로만 추인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의 얼굴이 동적형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음들이 얽혀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주자 朱子는 인간의 심리현상을 성 性과 정情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인간의 본성이 발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정이라 하였다.
희로애락 등이 정이고, 이것이 아직 발동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본성과, 그것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정이 라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럴 경우 정이란, 단순히 감정으로 일컫는 것 보다는 다소 넓은 개념이다.
표정 表情이란 이러한 정이 얼굴표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은 이성 못지않게 감성이 대단히 중요하고, 감성적인 아이디어로 상품을 내놓아야 고객의 관심을 끄는 시대에 표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충일한 덕의 표정은 스스로 내면의 세계를 잘 닦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갈등과 기로에서 선택해야 한다.
표정을 읽으면 마음을 알 수 있고 마음을 알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듣는 것은 글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언어폭력, 사이버 상에서 얼굴 없는 테러를 자행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맹자는 네게서 나온 것은 네게로 돌아간다. 출호이자 반호이자 出乎爾者 反乎爾者라고 하였다.
맹자의 명언이다.
나에게 나온 것은 나에게 돌아오고,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 돌아간다. 이 爾는 여 汝와 같은 뜻으로 너를 의미한다.

내가 한 언행은 모두 네게로 돌아온다. 선을 행하면 선이 돌아오고, 악을 행하면 악이 되어 돌아온다.
사람들은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둔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둔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날 리가 만무하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날 리가 없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종두득두 종과득과 種豆得豆 種瓜得瓜라 하지 않았던가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이 말속에는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게다.
남에게 증오의 화살을 보내면 남도 나에게 증오의 화살이 옴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내가 남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면 남도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온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이는 물리학 법칙인 동시에 인간생활의 법칙이다.

공연히 남이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에게 그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부메랑 되어 돌아온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어디 있으며 인 因은 반드시 과 果를 놓고 악인은 악과를 놓고 선인은 선과를 낳는다.

업業에는 반드시 보 報가 따른다. 선업 善業에는 선보善報가 따르고 악업 惡業에는 악보 惡報가 따른다.
네게서 나온 것은 모두 네게로 돌아간다. 참으로 이 말은 진리다.

오늘날 사이버 상에서 얼굴없이 무자비하게 문자테러로 자살로 이어지고 우울증과 염세주의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 홈페이지도 끝까지 실명제를 도입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동문들의 소통의 광장이 되고자 하였으나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부득이하게 하게 되었다.

이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더더욱 잘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신독 愼獨이라 하며 혼자 있을 때, 누가 보지 않아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언행을 조심하는 것으로 좌우명으로 쓰기도 한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무자기삼자, 시오평생소자면자 毋自欺三字, 是吾平生所自勉者
에 무자기가 앞글에 나와 있다.
또한 무자기無自欺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함축할 수 있다.
옛 선인들은 평생동안 화두로 삼고 삼가했던 말이다.

참으로 깊고 오매한 말이다.

문명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꼭 보고 지켜야 할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기회가 줄어들고 막혀진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에게 한번쯤 신독과 무자기를 알아주었으면 한다.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자기가 한 말과 글이 남의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한번쯤 성찰해보아야 겠다.
그래서 신독愼獨과 무자기無自欺를 지키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서는 꼭 해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실명제로 인하여 홈페이지가 위축되고 동문발길이 한산해져 개점휴업상태라면 이는 차라리 비실명제가 났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홈페이지는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체의식을 함향하고, 미래를 위한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갈등과 기로에서 고뇌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선택은 도덕적인 관념과 종합적인 경험에서 추출해낸 엑기수이며 인간의 정수精髓이기도 하다.

축구사랑방에 실명제를 실시해야 하는 안타까움에서 한번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아 보았다.

심재칠 3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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