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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제일고등학교총동창회

동문 에세이

[수필 ], 인생은 한권의 책이다 <21기>

2006.12.15 07:58 2,678 0 210 0

본문


<수필>

            인생人生은 한 권의 책이다

                      심 기 섭(수필가, 국회의원, 3선 강릉시장 역임)




  아침저녁의 소슬한 바람은 만추晩秋가 깊숙한 자리에 들어섰음을 가늠케 한다. 잦은 비로 햇볕에 달굴 틈이 없던 과실과 들녘의 오곡이 다행스럽게도 한층 무르익어 생명의 충만감을 절감케 하여 절로 안도감을 안겨준다.

  오랜 농경민족의 습성이지만, 기실 가을이란 계절과 느낌은 우리네 생체 리듬에는 늦가을 한 해 동안의 땀과 노력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로 입력되어 있다. 농토를 일구는 농부에게는 수확의 풍요로움이거나 사랑하는 연인에게 결혼기념으로 다가오는 게 이 계절의 맛이며 역할이기도 하다.

  온통 주위를 황금빛으로 장식하는 억새꽃이 너울대는 경포호의 가을은 한껏 운치를 더할뿐더러 티 없이 맑고 높은 하늘을 담은 호수는 그야말로 비취색, 경이로움의 절경絶景이다. 천년 문화가 눈부시게 꽃 피는 시향詩鄕인 강릉은 사계四季가 모두 뚜렷하지만, 특히 투명한 가을 하늘은 예술의 삼매경에 빠지게 하는 느낌이 절로 들게 하는 사유思惟의 시간대이다.    잠시 시름을 털어내는 나에게 있어서는 눈이 시리도록 옥빛과 한껏 부풀어 오른 순백색의 구름이 어우러지는 한낮의 하늘도 좋지만, 황홀한 핏빛 석양에 물든 채운彩雲이 빚어내는 부드럽고 풍부한 채색의 저녁 하늘은 더 없이 시상을 절로 절감케 하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의 아름다운 풍광과 미감이 아닐 수 없다.

  지난밤에는 낮게 깔린 구름이 바람에 밀려 흐르는 밤하늘을 응시하는데, 도심의 불빛을 머금은 구름이 경이롭게도 반투명 실크처럼 무척이나 환상적으로 신비로움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아, 그래서 선인들은 가을 황혼녘에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서책과 스스럼없이 담론을 나누며 독서의 이로움을 즐겼으리라.

  모름지기 인생은 사라가는 과정은 자신의 성서를 쓰는 행위이며, 바로 한 권의 책에 빗대어진다. 일찍이 ‘우리는 태어나서 저마다 삶을 마감할 때까지 매일매일 필연적으로 자신의 책을 기술하고 있다.’고 <파랑새>의 저자인 메테르링크는 지적하였다. 기실 한 권의 책과 같이 우리가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행위는 ‘나의 일생’이라는 기록을 흔적처럼 남기고 써가는 정신적 작업일 것이다. 우리의 소중하고 존엄한 일생에 걸쳐 씌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누군가는 실로 아름답게 또 누군가는 추하게 써내려간다.

  우리의 삶에 있어 희망의 선율이 강물처럼 흐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깊은 좌절의 늪에서 절망의 노래 가락을 나직이 읊조릴 때도 있다. 비록 충실하고 열정적으로 써내려가다가도 너무나 많은 시간 무성해지기도 하는데, 때로는 이 같은 갈등과 고뇌, 망설임에 의해 비로소 <나의 일생一生>이라는 한권의 자전적인 책이 탈고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번 씌어진 인생의 책은 세상의 책과는 상이하게 임의로 지우거나 폐기 처분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분신이고 문신文身과 같은 책은 남이 대신 써줄 수 없을뿐더러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과 판단, 그리고 노력과 열정에 의해 자신이 써야한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 세상의 이치란, 모든 것을 자신이 혼자, 몰두하고 외롭게 써야하는 것이 인생의 책이다. 근간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주어 가슴을 저리게 하는 산림청장을 역임한 이보식 청장의 고백처럼  “빈손으로 왔으니 흔적도 남김없이 빈손으로 가야지.”라며 가족 묘원을 없애고 그 터에 나무를 심었듯이, 오늘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엄연한 역사의 기록으로 누적되어 <나의 일생一生>이라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되어 “장대한 인간 드라마”로 감동을 회복하고, 충격적 감동을 안겨주는 인자因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한 권의 책은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주고 운명과 미래를 바꾼다.”라는 교시적 가르침을 그토록 일깨워 준 것이다.




              독서의 즐거움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 그리고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폐일언하고 일단, 누가 무어라하든 독서의 가장 큰 매력은 나를 즐겁게 하여주는데 있다. 조선시대의 명필인 완당 김정희 선생은 조선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당시 청나라에서도 그의 필력은 당할 자가 없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으며, 개인적으로 청의 문물에도 밝았고 또 교류하는 유명 인사들도 많았다.

  흔히 박학다식하고 뛰어난 기인들이 그러하였듯 완당은 성품이 강직하고 남달라 잘 모르고 신의와 도리를 어기는 사람에 대해서 가차 없이 추상같은 비판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이들은 무척 존경하고 따랐지만, 반면 그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와의 친분 쌓기를 꺼렸던 인물이기도하였다.

  정치적으로 불운하여 오랜 시간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 긴 시간대를 통하여 서예의 달인이 되어 신필神筆을 구사하였으며, 서체의 오묘함을 자신이 터득한 실체이기도하다. 완당 선생의 집 기둥에 “반일정좌半日靜坐 반일독서半日讀書”라는 글이 씌어져 있다. 즉, ‘하루의 절반은 고요히 앉아 자신과 만나고 그 나머지 반은 서책을 읽으며 옛 성현과의 만남을 통해 가르침을 깨닫는 사유의 시간을 지니라.’는 뜻이다. 그는 평생 가슴 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인식하여 줄곧 독서의 이로움을 장조하신 한 시대의 스승이며, 큰 어른이셨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는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불확실하고 불투명하여 공동의 세계가 무너져 있는 현상이다. 이 같은 사화 현상에 비추어 오동梧桐은 천년 늙어도 가락을 지니고 매화梅花는 일새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책을 통해 간접 체험을 하고 또 꿈을 키운 사람들은 마음의 자유를 결코 천만금일지라도 물질에 팔지 않는다. 그것은 보들레르의 지적처럼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생명적이기 때문이다.’

  항시 급변하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마음을 정좌하고, 높은 가을 하늘의 청명함과 경포호수처럼 푸른 생각으로 우리의 일상적 삶이 조급하고 짜증스러울지라도 매일 한번씩 책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신선한 감동을 회복하고 ‘성공한 이들은 머리가 말랑말랑하다.’는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현상을 저마다 절감하게 될 것이다.

  책을 통해 정신적 사유의 충만함을 접하면 인생의 즐거움과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삶은 찬란하여지고 지친 영혼 또한 놀랍게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사색의 공기로 허파를 채우는 명상 호흡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며, 초록빛 산소로 가득한 허파의 환희의 절규? 또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21기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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