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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제일고등학교총동창회

동문 에세이

나의 기행고백-난는 틀림없는 팔불출이오

2006.11.15 17:52 3,465 0 227 0

본문

필자는 성격이 비교적 꼼꼼하고 소심하여 공사간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신중한 편이다. 지난 세월  직장생활에서도 부하직원들의 품의서나 보고서의 틀린 글자 하나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언제나 완벽을 기하도록 요구했고 언행에 있어서도 어떤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일한 부하 직원들이 꽤나 힘들어 한 것 같다. 그러나 실상 필자의 과거 행적을 되돌아 보면 언행에 있어서 온갖 모순 투성이고 보통 사람이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기행을 수없이 해왔다. 오늘은 그런 기행적 언행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초등학교 시절 추운 겨울 날 선생님이 겨울을 이기는 지혜와 방법을 말하라는 요구를 받고는 어뚱한 대답을 거침없이 하기도 했다. 많은 학생들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등 그럴듯 한 의견들을 냈지만 필자는 옷을 많이 입어야 한단고 대답 해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려 꾸지람을 듣기도 하고 동료 학생들로 부터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벗, 하재규군, 노길남군(재미 통일운동가)과 함께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앞에 놓여진 교탁을 두드리며 괴상한 화음의 앙상불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그런 오락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오월 단오절 운동경기 때는 응원단장이라는 거창한 일도 맡겨졌다. 학군 후보생 시절에는 음담패설이 담긴 종교, 삽신교리(揷身敎理)를 발표해 함께 야영훈련에 참가한 후보생은 필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오락시간 제일번 순서는 삽신교주의 교리 설파였다. 필자의 이름을 모른는 사람은 있을 지언정 삽신교주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많은 동료들이 기억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여럿 있다.  종묘나 덕수궁을 들어 갈때는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지기에 다가가 문공부 문화재 관리국장이 외삼촌이라고 사기처서 들어 가기도 했고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일본 와세다 대학과 연세대, 고대와 게이오대학 축구 경기 때는 십여명의 동료들을 데리고 가서 운동장입구를 지키는 조선일보 직원에게 이상한 귓속 말로 전원을 무료 입장시키는 재치(?)도 발휘했다. 강릉 시공관에서 금마차 쇼나, 랑랑 쇼가 공연을 할라치면 아침부터 숙소인 여인숙(주로 여관이 아닌 여인숙에 머뭄)앞에서 서성이다가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강릉 청년단장입니다. 오늘 저녁 우리 청년단 소속 20명 정도 무료 입장이 되도록 해달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들의 대댭은 언제나 "저는 모릅니다" 였지만 필자는 극장 정문에 있는 기도에게 다가가 이미 승락을 받았다며 억지를 써 친구들과 공짜 구경을 여러번 했다. 그외에도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나쁜 짓도 많이 했음을 고백한다. 피해자들에게 늦게나마 용서를 구한다. 추운 겨울 날 술집에서 동료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는 동료들을 먼저 내보낸 뒤 2층에서 뛰어내려 발목 부상으로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여렷이 불고기를 먹고는 겁도없이 옆문이 아닌 앞문을 통해 일제히 도망가기도 했다. 함께 도망간 친구들, 지금 이름만 대면 동기생 누구든 알만한 친구들이지만 실명은 토로하지 않기로 한다. 이런 엽기적, 비도덕적, 불법적인 행동은 필자의 평상시 성격으로 미루어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 할수없다. 그러나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하곤 했다. 젊은 시절 오기에 불과한 객기이고 부질없는 삶의 단면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젊은 날의 객기나 싦의 단면으로 치부하기는 좀 심했다. 아연 실소하며 부끄러울 뿐이다.

 

일전 이곳에 선거 이야기를 썼지만 필자는 어떤 웅변가의 소개로 박정희 정권에서 아주 짧은 시간 정치라는 것을 경험했다. 선거유세는 제 8대 총선때 화천의 김재순 전 국회의장, 원주의 김용호의원, 춘천의 신철균의원, 삼척의 김효영의원, 강릉의 최돈웅의원, 속초의 한병기의원에 대한 지원 유세였고 그때 받은 감사의 촌지도 몇십만 원이나 됐다. 71년 당시 서울의 80평 주택이 200만 원 정도였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이런 작고 보잘것없는 정치행보(?)도 필자의 엉뚱한 기행적 성격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만약 20대의 다른 사람, 그 사람이 선거유세 경험이 전혀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부탁에 과연 유세를 했겠는가의 의문이다. 필자는 선거 연설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당시 무조건 승락하고 도전 한 것이다. 역시 기행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지금도 최돈웅의원은 필자를 만나면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않고 인사를 표하곤 한다. 영국에서의 각종 행사 사회자로서의 행동도 조금은 기행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벗, 이건재군과 김남하군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근무하는 동안 필자의 기행적 족적을 보고 들은 것으로 알고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송년행사 프로그램을 가능 한 잘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싶어했다. 프로그램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났고 그런 언발란스속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예술가도 아니고 그 분야에 특별한 소질도 없는 자가... 웃기는 일 아닌가.

 

사업과 관련해서 그리고 직장업무와 관련해서도 엉뚱한 도전을 많이 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한창기 사장이 전화 한대 놓고 시작한 "브리타니카" 와 김희탁씨가 설립한 "아메리칸 에듀케이터" 에서의 백과사전 외판사원 시절도 그져 돈을 많이 벌수있다는 생각만으로 기행적으로 도전했다고 추억된다. 그러나 그때 익힌 훈련이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브리타니카 출신)처럼 창업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다른 엉뚱한 추억이 있다. 74년 쯤으로 기억되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카라는 윤모회장이 필자를 찾아 온적이 있다. 그는 정일권 총리와의 인연(워싱톤 한국문고 이사장 때 인연) 으로 필자를 찾아왔는데 와싱톤에도 사무실(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씨 사무실과 같은 건물)이 있다면서 차관업를 해 보자고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신용등급이 낮아 정부 베이스의 차관도 어려운 시절이라 가능하겠느냐고 햬더니 자기가 우리 정부는 물론 미국에 로버트 케니디, 훌라잉타이거(비행기회사)의 마담 슈놀드, 풀부라이트의원, 하원의장등 정재계에 폭넓은 유대가 있다며 가능하다고 하면서 함께 해 보자고 졸랐다.

중략하고...필자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아메리카은행의 홍콩지점(지점장-존 베이커)에서 220만불을 빌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단 두명의 국제변화사가 있었는데 (심일로 빌딩에 있었던 국제변호사) 그들을 통해 계약이 성사되었다. 빌린 돈으로 일본에서 선령(船齡) 8년짜리 "실버벨"이라는 배를 구매하여 "주식회사 코리아라인(회장은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이맹기씨 였으며 금호 출신의 벗, 김문기군의 형이며 해사 출신의 마도로스였던 김정기씨가 근무하기도 했던 회사 임)"에 8년 거치 10년 분활 상환 조건으로 제공하고 국내보험사, 국내 재보험사 그리고 영국 로이드에 다시 부보하는 조건으로 배를 담보로 하며 배는 파나마 또는  라이베리아 플래그(깃발)를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훗날 듯기로는 "코리아라인"은 이 배로 많은 돈을 벌었고 스크랩다운(고철로 폐기처분)하는 가격만도 200만불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 사업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적같이 성공한 케이스였지만 동업자가 커미션 2% (44,000불, 원화 약 16,000,000원)를 모두 갖고 야반 도주하는 바람에 닭 쫗던 개 하늘 처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 이만한 돈이면 괜찮은 서울 주택 8채 값은 되는 적지않은 돈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것도 기행적인 도전이었다. 그런 기행적인 도전 덕택에 그리고 일확 천금에 눈이 어두어 2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만 낭비한 꼴이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도전을 통해 성공과 함께 보람을 느낀적도 있었다. 13년간 뒤지고 또 찾았지만 1300만 불이 한계라고 믿었던 홍삼 수출에 기적이 일어났다. 홍삼 수출을 매년 1,000만불 이상씩 늘려 6년만에 7,000만 불까지 끌어 올린 기적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업을 주관한 분은 회사 대표이사이시다. 그리고 다른 중역들과 협력을 통한 성과였지만 담당 중역으로서 그 중심에  필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용을 모두 설명 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 말하면 전략적 접근을 통해 수입자로 하여금 제 3국 재수출을 유도하여 올린 놀라운 성과였다. 필자는 이 성과로 훗날 산업포장도 받았다. 모두가 안될 것이라고 했지만 밋져 봤자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출장을 떠나  말레지아에서 해법을 찾았고 점차 홍콩, 싱가폴, 일본 등으로 확대 해 이룩한 송과다. 물론 잘 되지않았으면 역시나라고 말 할 만한 배팅이었다. 기행적인 도전이 가끔은 기적적인 성공을 가져오기도 한다. 

 

자,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필자는 자기현시욕이 강한 놈이며, 할 것과 못 할 것을 구분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도전하며 잘 난체하는 태생적 팔불출이 아닌가 싶다. 솔직이 말해 일등 팔불출이다. 지나가는 외국인들, 내 앞에만 보이면 언제나 예외없이 말 걸음에 시달려 피곤해 했다. 또 필자는 학구적인 친구보다는 세칭 건달이라 부르는 친구들을 더 좋아함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들의 단순한 성격을 특히 좋아해 만나면 얼굴에 금새 생기가 돈다. 실제 내가 좋아하고 그들이 나를 좋아하는 그런 선후배가 주변에 아직도 적지않다. 글쓰는 재주 또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겠다고 덤비는 괴상한 놈이다. 필자는 튀고 싶어 했다. 언제나 옷도 멋나게 잘 입고  모자도 멋나게 쓰고 싶다. 머리 털이 없어 외모는 별로이지만...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괴짜다. 좋은 차도 타면서 멋내고 싶다. 강릉 친구 두사람이 타고 다니는 링컨타운카가 욕심이 나 무리해서라도 타보고 싶다며 아내에게 조르고 있지만 국산품 애용하라며 막무가 내다. 얼마전 고향의 어느 동기생은 나더라 아주 특이한 캐랙터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렇다. 그것이 나를 보는 일반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기행들이 후회도 된다. 쓴 웃음도 나오고 개운치도 않다. 그래도 모두가 젊은 날의 잊을 수 없는 괴상한 추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기행을 끝냈으면 한다. 아니 끝내고 싶다.

 

사랑하는 벗들아,

오늘도 재미없는 한 개인의 예기로 지면만 더렵히고 말았네. "누가 카페에 개인 얘기 쓰라고 했나" 하며 대들면 할 말이 없네. 좀 심하다고 꾸짖어도 할 말이 없네. 용서하게나. 미안 하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 할께.  이번만 봐주게. 다시는....

 

못 난 팔불출, 조 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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