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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제일고등학교총동창회

동문 에세이

중앙인사위원장님, 퇴계 이황을 중용하시시오

2006.11.15 17:45 2,948 0 2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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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사위원장님! 퇴계 이황을 중용 하십시오




몇 해 전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금년에는 다산의 유적지를 찾게 되어 두 인물을 한께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 탐방을 자주하는 사람처럼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벗 박대균형처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런 까닭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이 두 분을 비교할 만한 지식과 능력은 더더욱 없다. 다만 필자의 동서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몇 차례 사극 드라마를 제작 한 경험이 있는지라 여행에 함께 동행 한 덕분에 이들 대가의 학문과 학풍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연산군 7년, 1501년 경북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다산 정약용은 30대에 유배와 다름없는 금정도의 찰방에서 지내면서 300여 년 전의 퇴계를 흠모하였다. 다산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도산이여! 퇴계물(退水)이여 어디에 있는지. 아스라이 높은 풍모 끝없이 흠모 하네”라며 퇴계의 학문과 인물됨을 높이 추앙하였다. 퇴계는 잘 알다시피 성리학의 대가이다. 다산 정약용은 퇴계와는 다른 학문을 쫓았다. 퇴계는 靜的인 敬 思想의 학문으로 일관하였고 그의 학문은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朱子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다산은 動的인 학문 경향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한때 자신의 動的인 학문을 크게 반성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朱子學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수사학(洙泗學)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어느 날 퇴계의 글을 여러 번 되풀이 해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고 감탄하여 무릎을 치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라고 하였다. 퇴계가 집대성한 학문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치민의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저술을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꾀 뚫어보는 혜안으로 백성들이 갖추어야할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조 오백년 역사 중에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가 탄생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흠모하고 있는 인물은 수없이 많다. 비단 다산과 퇴계만은 아니다. 우매한 민중을 계도하고 상상 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역저들을 통해 관리들의 올바른 국가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임금에게는 성군과 덕치가 무엇인가를 갈파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태평성대의 치세를 할 수 있도록 경연하였다. 따라서 퇴계는 만민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분명한 잣대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훌륭한 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오늘은 퇴계 이황의 사상과 그의 정치 그리고 역대 임금들의 인재등용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한다. 퇴계는 6세에 동네 노인으로부터 천자문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3세와 15세 때는 형과 자형으로부터 배웠다. 16세 때는 사촌동생, 친구와 함께 산에 들어가 독학을 했으며 23세에 성균관에 유학,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회시, 32세에 문과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다. 32세 때 문과 초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34세에 문과 급제하여 드디어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그는 44세까지 순탄하게 승진하였으며 44세 때 사헌부 장령, 홍문관 웅교를 지냈으며 48세, 49세에 단양, 풍기군수를 지냈다. 52세에는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임금을 모시고 강의를 하였으며 55세에는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여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58세에 임금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대사성으로 등용되었다. 59세에 병으로 다시 휴가를 받아 조정에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끈질긴 재촉으로 조정에 다시 나가 명종이 승하함에 따라 명종의 행장을 지었으나 예조판서에 임명되자 거듭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임금의 거듭되는 간청으로 다시 서울에 돌아와 임금이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의 중책을 겸임시켰으나 병으로 거듭 사퇴를 청하였으며 임금은 내의(內醫)와 함께 다시 휴가를 허가하였다.




조정에 있는 동안 그는 임금의 식사 반찬수를 줄이도록 할 것과 죄인을 사하지 말도록 진언하기도 하였고 17세의 선조임금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정치의 기본원리와 당면 과제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경연에서는 임금의 도리를 진언하고 선조대왕을 위해 자신의 평생학문을 응축하여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의 원리와 방법을 집약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69세 때 이조판서,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70세 사망 할 때까지 무려 140여종의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에 걸쳐 사직원을 냈고 30회는 사퇴서가 수리되었지만 49회는 뜻에 없는 봉직을 하였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조카를 불러 유서를 쓰게 하면서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 할 것, 비석은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하였다. 1570년 12월 5일 염습할 준비를 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그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내의에게 약을 보냈으나 내의가 당도하기 전 사망하였다. 임금은 애통해 하며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하였다.




퇴계는 당대 자타가 공인하는 문장가요 명필가요 명 연사였다. 왕은 항상 그를 시켜 대신들과 함께 경연하게 하였다. 왕은 언제나 그를 옆에 두려하였으나 퇴계는 왕이 내린 벼슬을 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관직은 곧바로 버리기 일쑤였으며 또한 제수된 벼슬 중에는 아예 봉직조차 하지 않은 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그를 왕은 수시로 불러 자문하려하였다. 이는 요즈음 기업에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리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으며 그의 학문은 당시의 학자나 유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철저한 청백리였다. 그는 국왕의 끔직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사양하고 향곡에 무치려했다. 그가 관직을 포기하고자함에는 여러 가지의 추정이 가능하나 20세에 얻은 병과 기묘사화에서 형이 피화되고 사화 후의 현실도피적인 사회풍토의 영향이 컸다. 당시 출사를 완전히 체념하는 인사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퇴계의 타고난 근본적인 성품 때문이다. 그의 행적 여러 곳에서 소극적, 피동적인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시대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펼친 조광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명백한 학자적 성품의 인간형이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퇴계를 생각하면서 요즈음 참여정부의 인사를 아쉬워한다. 사천팔백만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그토록 인재 찾기가 힘들까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이른바 코드인사를 버리지 않는 한 널리 구하고 엄격히 선발하며 적재적소에 배치해 지속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 인사관리의 기본원칙에 충실 할 수 없다. 참여정부 이전부터 우리정부는 중앙인사위원회라는 기구를 두고 많은 인재들을 전산망에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그 데이터의 인물들만 활용해도 훌륭한 인재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만을 찾으려하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나 공직 생활을 한 동기생들은 알겠지만 웬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중앙인사위원회의 전산망에 파일 화 되어 있다. 필자와 같은 하찮은 사람조차 불과 몇 개월 전에도 전산망에 수록된 내용과 다른 경력이 있으면 수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정도다

요즈음의 우리나라의 인사는 조선조의 인사관리만도 못한 것 같다. 잘 알다시피 조선조의 인재선발 기준은 한마디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신언서판의 기준이라도 철저하게 적용되는 인사라면 괜찮다. 인재등용의 기준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옛날에는 외모가 그럴듯하고 말을 잘하며 필체가 좋고 판단력이 있는 사람을 골라 썼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이었고 고위 벼슬아치가 되려면 과거에 우선 급제해야 했다. 물론 과거에 급제하는데도 신언서판의 기준이 어느 정도는 적용된다. 오늘날 고시에 합격하면 어느 정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오늘날 신언서판의 기준은 옛날과 좀 다르다. 외모의 기준만 해도 그렇다. 배가 나온 사람을 장군이라 부르며 성공한 사람의 상징처럼 여기던 시절과는 상판 다르다. 배가 나오면 미군에서는 규정에 따라 아예 장군이 될 수 없다고 들었다. 우리 군도 장군이 되기 위한 체력 검증을 하니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을 기업체에서는 선호한다. 특히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세계화 시대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 부류다. 그런데 글씨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물론 출세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사시나 행시에서 글씨를 잘 쓰고 빨리 쓰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얘기는 가끔 듣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듯싶다. 판단력의 기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증이 되고 있다. 조선조에는 과거를 통해 검증하였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사람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역시 조선조에 썼던 신언서판의 덕목이 많이 활용될 수밖에 없다. 필자도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수천 명의 신입사원 면접을 해 보았지만 그때의 판단 기준도 신언서판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취직을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시대이니 외모는 여전히 중요한 선발 기준인 것 같다.




필자의 잣대로 보면 참여정부가 등장한 이래 한명숙 총리의 중용은 비교적 성공적인 선택이라 생각한다. 어떤 한사람의 코드에 맞추기보다는 국민이 원하는 코드에 맞춰야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퇴계와 같은 큰 인물을 중용함에 있어서 당파를 고려하거나 직언을 서슴치 않는  강골은 안 된다는 것이 임금의 인재 찾기 원칙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서슴치 않는 사람을 코드가 다른 사람이라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조선조 여러 임금들은 과거 인물일수도 있는 퇴계를 거듭 거듭 중용하고자 했다. 한 고을을 다스릴만한 벼슬에 머무르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평생 높은 벼슬을 거부하는 퇴계에게 당파를 초월하여 중용하려 무진 애쓰는 임금의 노력이 가상하고 놀라울 뿐이다. 과거 공화당 사람도 좋고 국민의 정부, 군사정부를 가리지 말고 인재를 폭넓게 찾는 노력이 아쉽다. 그것은 중앙인사위원회와 같은 기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통수권자와 집권세력의 인재등용 의식이 개방, 개화되고 넓은 도량으로 참 일꾼을 발굴한다는 한 가지 원칙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방정부 역시 전국에서 인재를 찾아 중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강릉시가 필요로 하는 인사가 경상도에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러브콜을 내야 한다.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사람이 움직인다.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간이 곧 재산이고 유능한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참여정부의 중앙인사위원장님, 퇴계와 같은 인물을 널리 찾아 중용 하십시오. 반드시 성공합니다.

 

2006년 盛夏에

靑松  曺永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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