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50주년기념" 에필로그
2012.05.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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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늘 변함없는 우정으로 내 마음 한 켠을 지켜주어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
“늘 건강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 epilogue …♡
말씀 드리기에 앞서
먼저 작고하신 은사님
그리고 동기생들에게
‘묵념을 드립니다.’
참석하신 동기생 여러분!
우리 모두 조용히
타임머신을 타고
혈기왕성했던
십대후반으로 돌아가 봅시다.
1959년 4월 7일
우리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강원도 강릉시 교동 886번지
강릉상업고등학교 운동장에서
360명 입학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북으론 고성에서부터 남으론 울진
서쪽으로는 영월, 평창, 정선까지
각기 다른 중학교에서 공부라면
그래도 날고 긴다는 학동들이 모여
낯선 얼굴 익히고 힘 겨루노라
으르렁 거리던 것도 잠깐,
1960년 4,19혁명으로 학교가 어수선 했는데
다음해인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우리들의 인생여정이
복잡하게 얽혀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4,19 혁명으로 교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우리들을 막으려고 애 쓰시던
모교 선배선생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혁명정부는 대학입시의 획기적인 새로운 방안
‘국가고사’ 라는 정책을 발표하여
우리들의 대학 진로 선택에
많은 혼란을 가져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갈등을 격기도 하였고
뜻한 대학을 가기위해
일 년을 쉰 친구도 많았습니다.
모든 체제가 과도기여서인지
교장선생님도 세분을 모셨습니다.
1962년 2월 7일 졸업식엔
상과 129명, 문과 126명 이과 60명
모두 315명이 졸업을 하였습니다.
조갑환 선생님
권순열 선생님
정의곤 선생님
김재욱 선생님
김진걸 선생님
담임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교명이 강릉제일고등학교로 바뀐 모교는
올해로 개교 74주년을 맞습니다.
인문계학교로 변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전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박산운 작사, 김성태 작곡의 교가
「동해바다 우렁차게 해가 솟으면…」
교정에서 사단운동장에서
노암공설운동장에서
목이 터져라 부르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재건학생회장 서석용,
규율부장 이종익,
대대장 김병기, 어디계십니까?
강과 산이 다섯 번씩이나 바뀌고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학창시절
꿈과 이상을 꿈꾸던
마음의 교향인 모교는
우리들 뇌리에서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시사철 꽃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교정의 모습
봄이면 아름드리 벚꽃과 라일락향기
여름엔 짙푸른 녹음의 푸르름
가을이면 뒷동산에서부터 물들어져 오는
단풍의 자태
겨울이면 형언할 수없는 은세계가
교정 전체에 가득하고
가지마다 소담스런 눈꽃들이 장관을 이루어
우리들의 꿈을 담아주곤 하던 곳
지금도 눈에 선한
잊지 못할 교정의 모습
생생히 기억됩니다.
이제 며칠 지나면
단오제가 다가옵니다.
상농축구연맹전의 추억은
잊혀 지지 않는
영원한 추억거리입니다.
한 달 전부터
수업은 오전수업으로 마치고
응원연습 할 땐 정말 신이 났었는데
응원가 606호
「용맹 있게 함께 나가자 굳센 상고 용사들아…」
응원가 3333호
「씩씩하고 용감하다 강상건아들 무쇠 같은…」
응원연습의 지루함과 기압은 참아간다지만
정작 시합이 있는 날에는
왜 그리도 설레었는지
밤잠을 설치면서 맞은 경기당일의
각본 없는 예측불허의 돌발 사태는
때론 스릴로 때론 공포로까지
우리들을 흥분케 만들기도 하였지요.
농고응원단이 사단운동장으로
진입하는 시간에 맞추어
교문에서 출발하면서
밴드부의 연주에 맞추어
양학교가 부딪히는 순간에
사건은 벌어지는데
매년마다 터지는 사태의 양상은
그해 일 년 내내 우리 동네
강릉의 화제가 되곤 하였지요.
4.19가나던 해는 양교의 싸움이 도를 넘어
우린 체육관에서 감금되어 주먹밥으로 지샌
하룻밤의 추억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1961년 봄, 새벽, 경주로 출발해가던
우리 수학여행단은 강동지서에서
5,16을 맞아 뒤돌아 와야 했던 일
가을 설악산 신흥사앞 계곡에서의
서울 모대학교 학생들과
이유 없는 묻지 마 편싸움.
학창시절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
지금생각하면 웃음만 나옵니다.
우리네 인생길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든 가시밭길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들이 걸어온 인생여정도
왜 그리 험난했고
눈물로 얼룩진
한 많은 세월이었는지
세상에 태어날 때도
일제강점기 마지막 발악기인
1942~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간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한국동란
한글도 깨우치기 전에
전쟁이 뭔지 평화가 뭔지도 모른 채
목숨 건 피난살이 서러움을 겪었고
하루끼니조차 해결이 어려워
감자밥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며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슬픈 운명으로 넘어 온
꽃다운 젊은 날들
군대에 입대해선 월남전
제대해서는 예비군훈련
그리고 민방위훈련 등
우리들 깃수를 깃점으로 한
사안들이 연속이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의 시간들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저마다 큰 자리 보람된 인생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칠십 고개를 넘어 갑니다.
공자님은
나이 오십에 지천명이라 하고
나이 육십에 이순이라 하고
나이 칠십에 從心 所欲 不踰矩 라고 했습니다.
나이 70에 이르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은 인생 멋있게 보냅시다.
지난 개교 40주년 기념행사 때
제 12기 이성교 선배님의 시
『우리들의 자부심』을 소개해 드리면서
회고담을 마칠까 합니다.
『우리들의 자부심』
대한민국 하고도
강원도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한 40여년을
구름처럼 떠돌아 다녔어도
내 고향만 못했다.
강원도 하고도
강릉에서 자라길
참 잘했다.
앞에는 시원한 바다.
뒤에는 병풍처럼 둘러진
대관령
온 마을이
숲속에 싸여
인정이 꽃을 피웠다.
별과 같이 많은 학교에서
강릉상고를 나오길
참 잘했다.
산 좋고 물 좋은데
어찌 인물이
나지 않으리
시인도 여기에서 낳고
정치가도 여기에서 낳고
은행가도 여기에서 낳고
교육가도 여기에서 낳고
기업가도 여기에서 낳고
과학자도 여기에서 낳고
올림픽 선수도 여기에서 낳았다.
아!
자랑스러운
우리의 모교
강릉상고여~~~
2012년 5월 19일
부회장 김한수 드림
감사합니다.
이 밤을 즐겁게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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